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로핌 리센코 (문단 편집) == 영향 == 리센코식 용불용설은 타국에까지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 트로핌 리셴코가 어용학자로서는 물론, 스탈린 시대 소련 농업계의 1인자로서 활동했고 소련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쳤으나 그의 구시대에 머무르는 농업 지식들이 제대로 신세대의 지식으로 대체되지 않아 공산국가들의 농업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물론 소련에도 유능하고 훌륭한 과학자는 많았고 이후 리센코식 테크노크라트가 큰 영향을 끼쳐 업적을 제대로 남긴 학자들도 많았다. [[슬라브 신화]]를 다시 되살린 20세기 초중반의 인문학자들이나 [[스푸트니크]] 시리즈로 상징되는 공학적 기술 발달이 그 예시. 다행스럽게도 [[베트남]]이나 [[쿠바]]는 아열대라 [[폴 포트]] 정도의 뻘짓만 아니면 대응 가능한 수준이다. 이 사람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일단의 경향을 리센코주의(Lysenkoism)라고 한다. 굳이 유전학 등이 아니라도 [[사이버네틱스]] 공학이나 [[비교언어학]] 등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스탈린 시대에 들어 '부르주아 유사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탄압을 받았다. 주목받지 못하거나 탄압받던 여러 학문들이 재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기 개혁의 일환이었다. [[중국]]에서도 [[첸쉐썬]]이 농업 분야에서 비슷한 일을 벌이긴 했다. 이 사람은 생물학자도 아니었으면서 리센코의 이론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였다. 그래도 첸쉐썬은 자기 본업인 로켓 공학에선 천재이기라도 했지 리센코는 자기 본업인데도 말아먹었다.[* 물론 이론분야와 권력욕에선 부정할 수 없는 바보였지만 그 기반이 된 농사 기술과 실무적 지식은 어느 정도는 있었는데 공산당의 비호로 1인자가 된 것. 소련 농업판 원균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리센코는 자기 자신의 이론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냉소했다. 사실 그럴 만했던 것이 해당 시점에서 자기 이론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처녀지 개간운동이 이 당시까지는 대박을 쳤었기 때문이었다.[* 1954년에 소련 곡물생산량이 8500만톤이었던 것이 1960년에는 1억 2500만톤까지 불어났다. 단순 산술적으로 절반가량 늘어났으니 중국을 비웃은것은 당연했다.] 다만 자기가 날아갈 것을 자기도 몰랐기 때문에 후세에 웃음거리가 된 것이었다. 이렇게 나락에 빠질 뻔 했던 중국의 농업을 수렁에서 건져낸 인물은 위안룽핑이라는 인물로, 그는 [[중국공산당]]이 좋아했던 미추린 및 트로핌의 이론 대신 몰래 공부한 멘델과 모건의 이론을 통해 잡종강세를 이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쌀을 개발해냈다. 이 하이브리드 쌀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도입되어 기근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대한민국에서도 [[통일미]]의 개발에 영향을 끼쳤다.. 이 인물 덕분에 중국의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은 상위권에 속한다. 그 쌀이 맛이 좋은 것은 아니라 불만이긴 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